보통의 존재

이 책의 존재는 캣우먼이 자신의 사이트인 러브패러독스에 이 책이 참 좋더라고 쓴 것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책인지 한 번 봐 볼 만한 책으로 메모를 해두었었는데, 지난 설에 한국에 갔을 때 말 그대로 책 보따리를 선물해 준 시은 (aka Lucy)이 일하는 회사가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ㄷ일 줄이야. 그리고 이 책은, 두 명의 편집자 중 그녀의 이름이 먼저 나온 책 중 하나라는 것.

이 책의 인기가 상종가라는 사실에다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이 바로 내 친구라는 점 때문에 설레임을 가득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은 담담하고, 저릿하고, 희비극스럽고, 안타깝고, 흐뭇하고, 절절하고, 까탈스럽고, 황당하고, 연민스럽고 그랬다. 이 책의 원형이 저자의 웹사이트의 공개 일기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개인사 및 지극히 사적이고 내적인 이야기가 이렇게 한 권으로 책으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거겠지. 글을 읽으며 내 일상에서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과 아이디어, 그리고 글로 남겨서 공유하고 싶은 경험 및 추억들을 더는 미루지 말고 이 곳에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생각은 오래 전부터, 그리고 늘 갖고 있는 생각이지만 현실에서는 늘 육체의 피로 (특히 눈) 및 시간의 부족을 이유로 의욕만큼 실천을 하지 못했다. ‘보통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글쓰기를 위한 의지와 용기를 보태주었다.

12쪽.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 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37쪽. ‘이어달리기’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44쪽. ‘산책’
길은 풍경이고 풍경은 우리에게 생각과 느낌을 준다. 길을 걸으며 흐르는 풍경을 목도하는 것이 바로 산책이다.

89쪽. ‘고통이 나에게 준 것’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다.

102쪽. ‘이별 뒤의 사랑’
많은 연인들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연애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씁쓸하지만 헤어짐이 쉬워진 대신 이제는 헤어짐조차 영원하지 않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요? 오늘날 이별 뒤의 사랑은 이렇게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아닌 담담함으로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104쪽. ‘연애의 풍경’
난 여자가 사랑에 완벽하게 빠졌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너무나 충만해서, 기쁨에 겨워 눈은 반쯤 감긴 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누군가를 한없이 바라보는 바로 그 표정.

109쪽. ‘세잔’
‘본질을 아는 것보다, 본질을 알기 위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것이 바로 그 대상에 대한 존중이라고.’

115쪽.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역시 조언이란 건 남의 상황을 빌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117쪽. ‘해바라기’
소나기는 정말로 운치와 재치가 있거든. 짧고 굵게 낭만적으로 쫙 한 번 내려주고 바로 해가 뜨니 말이야.

122쪽. ‘오, 나의 음식들아!’
그 다음 버섯. 아주 음흉한 놈이다. 어렸을 땐 버섯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기도 아닌 것이 잡채 속에 들어가 늘 고기 행세를 하며 사람을 기만하지 않았던가.

182쪽. ‘어느 보통의 존재’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208쪽. ‘문자’
문자가 안 오면 운동을 해.

212쪽. ‘상처’
흉터들이 생긴 연유를 살펴보자. 우선 맨 위에 있는 약 0.7센치 정도 길이에 다소 두껍게 살이 올라온 녀석은 어릴 적 기르던 개 검둥이가 내가 떡을 주자 급한 마음에 내 손까지 무는 바람에 생긴 흉터다. 사고가 나자 아버지께서 “저 새낀 개의 자격이 없다”며ㅕ 화를 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 나는 검둥이가 검은색이었다는 게 너무나 컴플렉스였다. [...] 이것이 바로 나의 양면성이다. 개를 애틋이 여기는 마음은 강하면서도 개까지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날엔 또 그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참으로 바보 같지만 어쩔 수 없는 내 모습.

239쪽. ‘함께 산다는 것 – 결혼 이야기’
명심하라. 결혼이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결혼은 당신에게 수많은 새로운 문제를 던져준다. 당신이 당신의 동반자와 기꺼이 그 문제를 풀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때 감행하라. 그 무섭다는 결혼을.

309쪽. ‘프로포즈’
사랑하자는 건 헤어지자는 거지, 안 그래?

사랑만 안 하면 평생을 볼 수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랑을 해서 일이 년밖에 안 봐야 돼?

316쪽. ‘연애는 패턴이다’
연애는 패턴이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애란 매번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된다 다시는 이런 사람 안 만날 거야, 하고 결심해도 매번 엇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이번에야 말로 다른 사람을 만난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드러나는 모습에 예전 그 사람의 그것이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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