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Along with Jungkwon Chin, Noja Pak is my favourite progressive scholar and public intellectual. The best thing I like about them is that the way they write about certain subjects which lead me to understand them in a different way, from a point of view which speaks for the people in minority groups.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East Asia We Haven’t Known)” was the first book of his I read, and I’m planning to read all the books he wrote. ”박노자의 만감일기 (Noja Pak’s Diary of a Thousand Emotions)“ is a collection of his posts mainly on his blog and below are quotations from the book.
진중권과 더불어 박노자는 내가 좋아하는 진보주의자이자 대중과 교감하는 학자이다. 내가 이 두 저자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점은 특정 주제에 대하여 논하는 그들의 태도인데, 이는 소수집단을 대변하는 목소리이기에 현상들을 다른 시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작년에 읽은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처음 읽은 박노자의 저서인데, 그가 쓴 모든 책을 읽을 계획이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대부분 ‘박노자글방’에 올린 그의 블로그 포스트를 모아 엮은 책이다. 본문에서 발췌한 몇 가지 문장을 아래에 옮긴다.
6쪽. <일기를 쓰는 의미에 대하여> 일기쓰기가 자기 주체성 확립의 장이라면 인터넷 일기쓰기는 그 주체성에 ‘대타성’을 부여한다. ‘내면’ 전체를 ‘남’에게 다 ‘개방’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일부를 ‘열어놓아’ 토론 대상이 될 만한 민감한 문제들을 놓고 과감히 ‘소통’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 일기쓰기의 묘미다. 그렇게 해서 ‘나 홀로’의 폐쇄성을 벗어나 ‘남’과의 ‘의미의 공유’가 가능한, ‘열린 주체성’으로 가는 것이다. ‘남’의 의견이 ‘나’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나’의 일기가 또 누군가의 ‘내면’에 가 닿아 수많은 주체들이 하나의 망을 이루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터넷 즉, ’타자들 사이의 거미줄’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22~23쪽. <1부-나를 넘어, ‘타향살이, 불안의 일상화’> ‘삼성관’이니 ‘포스코관’이니 하며 기업체와 완전히 유착돼 버린 대학에서 조직 속에 나를 묻은 채 사는 것보다는 덜 불행하기는 해도, 타향살이란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난 외인(外人)’이란 의식을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탓이다.
28쪽. <1부-나를 넘어, ‘부처님 오신 날’> 불교의 중심 교리는 우리의 고통들이 외부환경에 의해서 현실화되어도 그 근본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을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모든 욕망을 마치 ‘나’와 불가분의 요소인 듯 보게 된다. 이로 인해 욕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번뇌를 상대화시켜 줄이지 못하고, 그 때문에 공포심은 커지게 된다.
68~69쪽. <1부-나를 넘어, ‘”코리안 호스티스가 필요하세요?”‘> 성해방적 사고의 출발점은 ‘자유의사’다. 혼전의 성이든 혼외의 성이든 일단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어떤 강제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돈을 주는 고객과, ’이차’를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즉 경제적인 강제를 받는 ‘호스티스’의 관계는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관계에 있는가? 경제력을 독점한 남성이, 경제력이 결여된 여성에게 경제력을 무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성매매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 구매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성욕을 ’돈으로’ 충족하는 사람들은 ‘경제력에 의한 강간’을 오랜 기간 당해온 여성의 심신이 과연 어떨지 생각이나 할까?
71쪽. <1부-나를 넘어, ”친절’이라는 국제자본주의체제의 코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친절도 관리’라는 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이야기했던 ‘노동자의 심신 유순화 기술’에 해당한다. 고객이든 사업주든 돈을 가진 주체를 무조건 ‘왕’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걸 노동자에게 내면화시키면 노동자를 다루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5%의 자본주를 제외한 모두가 불안에 떠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유순해지고 길들여지며 일반 서비스 노동은 ‘감정 노동’의 요소가 강해진다. 이 스트레스 도가니에서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계층은 ‘감정 노동’, 즉 고객의 ‘기분 맞추기’에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야 한다.
84쪽. <1부-나를 넘어, ‘인권, 아직 오지 않은 ‘근대”> 우리는 삼성과 같은 기업을 볼 때 ‘인권적 측면(노조 불허 원칙의 반인권성)’보다 ‘국민 경제 기여도’ ‘직원들의 비교적 높은 보수’ 등에 먼저 눈을 돌린다. 우리에겐 여러 가지 근대적인 척도들 중에서 ‘인권’보다 삼성이 담보한다고 인식되는 ‘부국’ 또는 개인들의 ‘경제적 위치’가 더 일차적인가 보다.
161쪽. <2부-우리를 넘어, ‘한국사 교과서를 쓰면서 역사 속의 선악을 생각하다’> 최근 며칠간 주로 식민지 시기 후바을 다루는 러시아어판 한국사 교과서를 쓰느라 거의 두문불출했다. 암울한 시기를 다루는 교과서를 쓰면서 한 가지 고민을 계속했다. 역사쓰기 작업은 대개의 경우, 역사를 쓰는 주체가 그걸 원치 않더라도 역사 평가의 작업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일제와 투쟁했던 여러 단체나 개인의 행동을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게 됐다. 일제의 억압적인 지배는 역사 속의 ‘악’임에 틀림없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 ‘악’과 맞서 싸우셨던 모든 분들이 ‘선’을 대표했던가 하는 점이다.
240~241쪽. <3부-국가와 민족을 넘어, ‘김일성대학 기숙사의 국제 사랑 이야기’> 그런데 거시적으로 봤을 때 국제결혼의 증가에 따르는 지구 주민들의 ‘혈통적 혼합화’야말로 결국 통합된 ‘지구 문화’의 창달을 향한 첩경이 아닌가? 좀 이상주의적 접근인지 모르지만 나는 국제결혼이 진정한 ‘밑으로부터’의 지구화를 위한 초석이라 생각한다. 그걸 거부하는 정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역사적인 정권이다.
257쪽. <3부-국가와 민족을 넘어, ‘역사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면?’>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쩌면 사학의 진정한 효용은 정치인들이 악용할 수 있는 위험한 민족주의적 신화의 출현과 보급을 차단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판치기 쉬운 민족주의에 대해 건강한 회의론을 키우는 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340쪽. <4부-경계를 넘어, ‘우리가 영어에 매달리는 이유’> 이제 한문은 정말 대다수에게 ‘외국말’이 다 된 느낌이다. 그런데 그만큼 개개인이 지적으로 가난해졌다고 하면 너무 극언일까? […] 그러나 평범한 베이징, 서울, 도쿄의 젊은이 세 명이 오슬로에서 만날 경우라면 거의 어김없이 영어를 선택할 것이다.


As a non-fiction lover, I hardly read fiction - I hadn’t read any fiction books for the past few years until I recently read Ian McEwan’s “Amsterdam”. When I visited my friend in June, I heard about the work ”
